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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웅 × 홍경한: 빌런에서 히어로로
2025.08.19
INTERVIEW
배우로서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최근에는 아티스트로서도 주목받고 있는 박기웅. 한국의 미술평론가 홍경한과 함께한 이번 대담의 전편에서는, 이번 화이트스톤갤러리 서울 전시 「Future Superhero」로 이어지는 ‘빌런 시리즈’의 배경과 연기와 예술을 구분하지 않는 창작 태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예술과 연기는 나눌 수 없다
홍경한과 박기웅
홍경한: 작가님 짧게 소개를 좀 해주세요.
박기웅: 안녕하세요. 연기도 하고 있고 그림도 그리고 있는 박기웅입니다. 반갑습니다.
홍경한: 인터뷰 내용이 일본어나 영어로 번역되어 공개된다고 하니, 외국에 있는 팬들과 박기웅 작가님의 그림을 좋아할 만한 분들이 궁금해할 질문을 드릴게요. 작업에 대한 영감은 어디서 받으세요?
박기웅: 처음에는 배우 박기웅과 작가 박기웅을 분리하고 싶었어요. 그게 현재 활동 중인 분들에 대한 예의나 평등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죠. 대단한 담론을 던져야 할 것 같고, 분리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다 보니 스스로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홍경한: 꾸며내는 듯한, 뭔가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듯한 느낌이었나요?
박기웅: 네. 저는 좋은 작업을 하고 싶은데, 연기가 제 인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왔잖아요. 그런데 그걸 작업에 녹이지 않는다면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시작한 게 ‘빌런 시리즈’입니다. 악역으로 많은 조명을 받았던 시기도 있었고, 선역을 더 많이 했음에도 악역 전문 배우처럼 보였던 적도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빌런을 바라보는 관객들보다 제가 훨씬 더 그들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느꼈죠.
빌런 연기의 가장 어려운 점은 그들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인간 박기웅은 ‘이건 나쁜 짓이다’라는 걸 알지만, 캐릭터로서의 저는 ‘이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고 느낍니다. 예를 들어 <각시탈>에서 독립군을 고문하는 장면도, 캐릭터 입장에서는 당연한 행위가 됩니다. 그 괴리 때문에 힘들 때가 많았죠. 하지만 생각보다 악역들은 매우 단편적이고 기능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주인공이 영웅적인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계기 정도로 쓰이는 경우가 많죠. 저는 그 지점을 잘 이해한다고 생각했고, 곰곰이 보니 세상 사람들도 화려한 주인공이라기보다 사회의 한 조각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더군요. 그러나 각자의 인생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입니다.
리듬이 스며든 레이어의 깊이
화이트스톤갤러리 서울
홍경한: 악역이냐 선역이냐를 떠나서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문장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신거죠? 배우로서의 정체성과 전공자였던 한 예술가로서의 자아가 지금 예술이라는 하나의 장르 안에서 새롭게 빚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또 하나는 악역이 주인공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중요한 요소가 되는 역할이라는 점, 그리고 그걸 자기 안에 체화시키는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작업을 할 때는 보통 15시간씩 그림을 그린다고요?
박기웅: 네, 그 정도 작업합니다. 갑자기 생각나면 밤 12시에 잠옷을 입고 작업실로 가기도 합니다.
홍경한: 15시간 동안 어떤 과정을 거치나요? 에스키스부터 시작합니까?
박기웅: 네, 에스키스부터 합니다. 특히 이번 시리즈의 경우, 예전에는 드로잉으로 에스키스를 많이 했는데, 이번에는 파편들을 모으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어요. 디지털 이미지를 포토샵으로 전부 구성한 뒤, 그걸 보고 작업했습니다. 지난 전시보다 레이어가 훨씬 많이 쌓였죠. 그리고 이번에는 뭔가를 더하는 것보다 이미지가 흐려지는 느낌을 표현하고 싶어 마티에르를 두껍게 올려 찍어내고, 팬이나 붓으로 문지르기도 하며 작업했습니다. 이렇게 레이어를 쌓고 찍어내는 과정을 계속 반복했죠.
홍경한: 나름 복잡한 과정이네요.
박기웅: 네. 작품마다 다르지만 보통 7~9번 정도 레이어가 쌓인 것 같습니다.
홍경한: 자세히 봐야겠네요. 새로운 발견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색감이나 형식만 보일 수 있지만, 안에 담긴 깊이까지 볼 수 있는 작업이네요. 감사합니다.
박기웅: 그리고 이번 시리즈에 들어간 텍스트들은, 이를테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오션스 일레븐’, ‘다크 나이트 라이즈’ 같은 영화 대사들입니다. 특히 대사들은 제가 의도적으로 흐리거나 흔들어서 보이게 했습니다. 배우로서의 해석이죠. 대사의 운율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걸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홍경한: 그래서 작가 노트에 ‘운율’이라는 표현이 있었군요.
박기웅: 네. 텍스트가 화면에 들어가면 매우 직접적이기 때문에 일부러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근거리에서 명배우들과 마주하다
작품을 바라보는 박기웅과 홍경한
박기웅: 제가 피사체로 등장하거나 연출을 하더라도, 이 작업을 온전히 미술계 작품으로 보기보다는 제가 몸담았던 장르의 작품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평면 작업뿐 아니라 조각(Sculpture) 작업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작년부터 이런 과정을 거쳐 제 작가 세계관이 어느 정도 구축되면, 이후에는 미디어적인 연출도 시도해볼 계획입니다.
홍경한: 지금은 일종의 ‘담금질’ 과정에 있는 거군요. 배우로서의 경험에서 나온 운율과 세계관이 회화 작품 속에 체화 돼 있는 것 같습니다.
2023년 화제의 전시, 48명의 빌런. 30만 명이 다녀갔다고요?
박기웅: 네, 30만 명 조금 넘게 오셨습니다.
홍경한: 대단한 숫자네요. 반응은 어땠나요?
박기웅: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습니다. 빌런 역할을 한 배우들의 초상화가 흑백으로 구성 되어있어 대중적이라기 보다 다소 무섭다고 느끼신 분들도 있었죠.
홍경한: 미술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도 많았을 텐데요.
박기웅: 그렇지만 배우의 얼굴이 들어간 작품이라 대중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신 분들도 계셨을 겁니다. 실제로 관람객 중 상당수는 영화 속 인물 찾기 놀이를 하며 즐기셨죠. 저는 그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반적인 초상화 작업과는 개념적으로 완전히 다르게 접근했죠. 가끔 연기를 하면서 존경하는 선배 배우들과 함께할 때, ‘이 장면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전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홍경한: 배우가 배우에게 빠져드는 순간이네요.
박기웅: 네. 저는 카메라 앵글이 좁아질수록 오히려 자유로워집니다. 앵글이 좁아지면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제 방처럼 느껴져서 좋습니다. 카메라가 타이트하게 비추면 일부러 잠시 멈췄다가 대사를 이어가기도 하죠. 이런 행동 대사나 리액션이 포트레이트 작업과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명배우들이 제 상대역이라고 상상하며 작업했죠.
홍경한: 그래서 그림들이 모두 근접한 얼굴이군요.
박기웅: 네. 존경하는 선배와 연기할 때, 정말 이 정도 거리에서 오버숄더 샷을 찍는데, 그 순간이 너무 좋아서 전율이 옵니다. 그 느낌을 작품에 담고 싶었어요.
흑백으로 엮은 48인의 초상
화이트스톤갤러리 서울
홍경한: 48명의 빌런이 그냥 나온 게 아니네요. 말씀을 들으니 다 이유가 있군요.
박기웅: 네. 구조적으로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48 포트레이트’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오마주는 아니지만, 48점으로 구성한 방식이 흥미로웠죠. 원래 한쪽 벽면에 군집 형태로 걸고 싶었는데, 전시장 여건상 두 줄로 걸었습니다. 전시 후에 작품 소장 문의가 많았지만, 48점이 하나의 작품이라 전체를 소장하지 않으면 판매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홍경한: 하나라도 빠지면 완성체가 아니니까요.
박기웅: 맞습니다.
홍경한: 리히터는 작품 제작 전에 수백 개의 자료를 검토하고 초이스 했다고 하죠. 박기웅 작가님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나요?
박기웅: 물론입니다. 48점만 그린 건 아니고, 더 많은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자료를 찾다 리히터의 작품을 보고 ‘이게 내가 원한 구성이다’라고 느꼈죠.
홍경한: 보는 순간 구성이 마음속에 그려졌군요.
박기웅: 네. 그리고 저는 흑백을 선택했습니다. 영화에서도 ‘기생충’ 흑백 버전처럼, 흑백이 주는 감정이 좋거든요. 색에 방해받지 않고 표정과 감정이 잘 보입니다. 그래서 흑백으로 작업하기로 했죠.
홍경한: 흑백이 주는 정서적 반응 때문이군요.
박기웅: 네. 흑백에 리히터의 구성을 결합해 48점을 완성했습니다.
박기웅이 감정의 리듬을 엮어내는 제작 과정과 배우로서의 경험에서 탄생한 시리즈에 담긴 생각까지, 홍경한이 그 표현의 핵심을 파고들었다. 후편에서는 현재 진행 중인 전시 「Future Superhero」에 선보인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