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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을 넘어 진실로: 헨릭 울달렌이 전하는 상실과 한국의 뿌리

2025.09.17
INTERVIEW

1986년 한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노르웨이로 입양된 헨릭 울달렌(Henrik Uldalen). 조부모의 죽음을 계기로 시작된 그의 예술적 탐구는 결국 마음속 깊은 ‘벽’과의 대면으로, 나아가 오랫동안 봉인해왔던 출생의 비밀과 마주하는 여정으로 확장되어 간다. 

조부모의 죽음과 자아 탐구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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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스톤 갤러리 서울

―당신이 아티스트로서 걸어가기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울달렌: 어릴 적부터 그림, 아크릴, 수채화 등 예술 행위 자체에 늘 관심이 있었지만, 십대 초반이 되어서야 더 절실하게 나를 정확히 표현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계기는 조부모님의 죽음이었고, 저는 그것을 몹시 힘들게 받아들였습니다. 건강한 방식으로 감정을 다루는 법을 몰랐던 저는 결국 예술을 통해서만 그것을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죽음 이후 오랫동안 스스로를 해치지 않기 위해 마음속에 두터운 벽을 쌓으며 살았지만, 그 속에서 보호받는 동시에 아무런 감정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점점 평평하게, 생기가 사라져갔지요. 당시의 작업들은 그런 제 상태를 반영하듯 차갑고 색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다 평생 꿈꿔왔던 몇 가지를 이루었음에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 때, 저는 그 벽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수년간 여행하고 탐구하며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림과 예술을 가장 중요한 도구로 삼아 제 안의 방어 기제를 파헤쳤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벽을 허물며 나아갔습니다. 그때부터 제 삶과 예술은 늘 제 자신과 정신 건강을 이해하는 과정에 관한 것이 되었고,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여정이 되었습니다.

기법과 감정의 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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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스톤 갤러리 서울

―작업에 사용하는 소재,기법, 그리고 과정에 대해 알려주세요.

울달렌: 저는 주로 유화 작업을 해왔고, 유화는 지난 18년 동안 언제나 가장 가까운 매체였습니다. 저는 클래식한 유럽 미술, 후기 르네상스와 바로크, 신고전주의 미술을 사랑하며 자라왔습니다. 섬세하고도 절제된 정밀함은 제 성격과 잘 맞았고, 당시의 저를 달래주는 힘이 있었습니다. 마치 요가의 고요한 만트라처럼, 아름다운 모든 것에 저는 매혹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제 마음이 열리고 모든 벽이 무너진 이후, 더는 인내심 많은 상태가 아니었고 오히려 감정적으로 변했습니다. 안전지대에 있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기법과 재료, 과정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늘 꿈꿔왔던 그림을 더는 그릴 수 없게 된 것이죠. 인내심은 잃었지만, 대신 제 감정적 기질에 대한 이해를 얻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가능한 한 가장 진실된 모습을 담아내고자 했고, 이전의 방식이 더 이상 제 자신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명반을 커버곡으로 다시 연주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더 이상 거대한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를 그리지 않을 겁니다. 대신 제 마음과 기질을 정확히 드러내는, 진실된 예술을 만들 것입니다. 그 과정은 달라졌습니다. 현재의 감정을 보다 즉각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시간 사용, 그리고 그에 맞는 새로운 매체의 선택. 이것이 지금의 저에게 맞는 작업 방식입니다.

표현의 변천과 실존의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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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k Arrestad Uldalen “DEBRIS” 2018, 120x180cm, Oil on Wood

―초기의 하이퍼리얼리즘적인 작품에서 현재의 스타일에 이르기까지, 작품은 어떻게 변화해왔나요?

울달렌: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와 함께, 시각적 미학의 변화도 불가피했습니다. 지금의 그림들은 제 순간적인 정신 상태를 훨씬 더 정확히 보여줍니다. 예전에는 몇 주 동안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모든 것을 미리 계획한 뒤, 마치 번호를 따라 칠하는 듯한 방식으로 작품을 완성했지만, 지금의 작업 방식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초기에는 몇 달에 걸쳐 한 작품을 붙들고 있었고, 완성할 즈음에는 애초에 왜 그 그림을 시작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위대해지고 싶다는 욕망, 재능 있어 보이고 싶다는 갈망, 기법을 과시하고 싶다는 마음이 제 작업에 뚜렷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일종의 ‘베스트 앨범’을 만들 듯 사람들을 만족시키려 했던 것이죠. 하지만 지금은 직관에 의존해 직접적으로 작업합니다. 장기간 준비하는 것은 전시의 큰 구상 정도이고, 실제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예술이자 일종의 퍼포먼스가 됩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답을 찾고, 스스로를 이해하며,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마치 잠재의식과 나누는 대화처럼요.

이제 제 작품은 거칠고 원초적이며, 어떤 여과나 미화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남을 감동시키려는 야망조차 없습니다. 이 작품들은 철저히 저 자신을 위한 것이고, 저는 예술이 먼저 작가 자신을 위한 것일 때야말로 타인에게도 가장 큰 울림을 준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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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스톤 갤러리 서울

―당신의 작품에서 탐구하고 있는 핵심 테마나 감정은 무엇인가요?

울달렌: 제 작업의 중심에는 늘 실존주의가 자리합니다. 겉보기엔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곳에서 목적을 찾는 것이지요. 어린 시절부터 저는 침대에 누워 ‘나는 왜 여기 있는 걸까?’라는 질문을 품곤 했습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나 직장에 가는 것이 수천 년 후 모두 잊혀질 텐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랫동안 저는 불멸과 유산에 집착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가 내가 존재해야 할 자리임을 깨달았습니다.

정직한 작업과 소박한 생활, 그리고 험난한 길을 걸어온 이웃들을 돕는 단순하고 진실한 삶. 그것이 제가 추구하는 삶입니다. 제 작업은 여전히 실존주의를 중심에 두고 있으며, 아마 평생을 함께할 것입니다. 하지만 남을 돕기 위해서는 먼저 제 스스로의 싸움을 마주해야 합니다. 제 모든 작업은 결국 저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여정입니다

제도 밖에서 찾은 진정한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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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스톤 갤러리 서울

―당신은 독학 아티스트인데, 그 경험이 회화에 대한 접근법이나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울달렌: 제가 그림을 시작했던 초기에, 저는 미술 학교와 아카데미에 지원했습니다. 되돌아보면 합격하지 못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미술 교육의 가치도 인정합니다. 다양한 아이디어와 도구, 열정적인 다른 예술가들과의 접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저는 대부분의 기관에는 여전히 회의적입니다. 배우고, 삶을 탐험하며 경험하는 과정 자체가 제 창작의 핵심입니다. 세상으로 나가 실수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며,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성장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살아 있을 때, 예술은 흥미로워집니다. 누군가 모든 정답을 손에 쥐여 준다면, 제게는 그것이 창의성의 죽음처럼 느껴집니다.

현재 저는 제 자신의 워크숍을 열고 있으며, 그 중심은 새로운 아이디어 탐구, 틀 깨기, 그리고 진정한 자기 목소리 찾기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강조하는 점은 제가 모든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는 오직 본인만이 알 수 있습니다. 저 자신에 관해서는, 트렌드보다 앞서가는 일은 없을 것이며, 그것이 문제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매 순간 스스로에게 진실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를 편안한 영역에서 끌어내고, 변화를 계속하게 합니다. 항상 최고의 그림이 나오진 않지만, 그 과정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 과정 속의 실수와 잘못된 길이야말로 저를 새로운 작업 방식으로 이끌었습니다

뿌리로의 여정: 입양아로서의 정체성과 마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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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스톤 갤러리 서울

―한국은 당신 뿌리의 일부입니다. 이 전시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나요?

울달렌: 이번 전시는 제가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길을 걷는 여정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입양아라는 사실을 한 번도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노르웨이에서 사랑 가득한 가정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에는 그저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지내고 싶었을 뿐입니다. 부모님께서 제 입양 기록을 보고 싶냐거나 과거를 알고 싶냐고 물으셨을 때, 저는 재빨리 대화를 닫아버렸습니다. 그저 다른 아이들처럼 금발의 가느다란 머리카락과 눈이 크지 않은 얼굴을 가진 존재가 되고 싶었을 뿐입니다.

최근 몇 년간의 자기 탐구 과정은, 평소라면 피했을 모든 것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지난 50년간 한국 입양 과정에서의 잘못된 사례들이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면서, 그 겉모습 뒤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는지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제 입양 기록을 읽어보았지만, 그 내용의 신뢰성에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저는 더 알고 싶습니다. 입양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며, 어떤 이유로 저를 입양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다른 입양 아동들의 배경과 이야기도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한국인이 이야기하기를 피해온 듯한 부분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새로운 표현이나 프로젝트가 있나요?

울달렌: 저는 입양이라는 주제, 특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좀 더 깊이 탐구하고 싶습니다. 앞서 말했듯, 먼저 자신을 돕고 나서야 타인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들의 배경과 삶, 좋았던 경험이든 힘들었던 경험이든 듣고 싶습니다. 그들이 지금 삶에서 어디에 있는지, 진실을 찾는 여정에서 해답을 찾았는지도 보고 싶습니다. 저는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이 문제에 대한 대화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 상황은 언제든 변할 수 있습니다. 만약 더 이상 이 주제를 탐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거나, 다른 것을 탐구하고 싶다고 느낀다면, 저는 그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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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k Arrestad Uldalen “Untitled #5” 2021, 32 x 24cm, Oil on panel

클래식 리얼리즘에서 영혼의 깊이를 그대로 드러내는 표현에 이르기까지, 헨릭 아레스타드 울달렌의 작품은 인간 정신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여정을 따라갑니다. 완벽함을 내려놓음으로써 그는 진실을 발견했고, 그 진실은 이제 우리에게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헨릭 울달렌: LOST/F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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