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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음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이상향을 찾다|아루타 수프 인터뷰
2024.03.21
INTERVIEW
아틀리에에서 작업 중인 아루타 수프
무기력한 표정의 토끼 한 마리가 화면 속을 제멋대로 누빈다. 사랑스러운 모습과 선명한 색채,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선을 통해 위태로운 일상이 그려진다. 화이트스톤 갤러리에서는 그래피티의 영역을 넘어 아티스트로서 활동하는 아루타 수프의 첫 개인전을 개최한다. 우리는 작가의 아틀리에를 찾아가, 그 창작 과정에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ARUTA SOUP Solo Exhibition: Ruins
몇 번이고 녹아웃당해도, 그때마다 다시 일어난다
"SANDWITCH (peace maker) " 2024, 193×169cm, Water based paint on Canvas.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필두로, 피터 래빗이나 미피 등 토끼라는 생물은 그 사랑스러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다. 귀여움의 상징이기도 한 토끼는 아루타 수프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지만, 그가 그려내는 존재는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HARD HITTER" 2024, 150×150cm, Water based paint on Canvas
검은 옷을 입고, 발에는 붕대를 감고, 손에는 흰 장갑을 끼고, 머리에는 깁스를 한 채,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는 이 토끼의 이름은 ‘ZERO’이다.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거나 반려동물을 산책시키는 등 지극히 평범한 하루를 보내기도 하지만, 거대한 샌드위치에 몸이 끼이거나 전자기기와 연결되기도 한다. 일상과 비일상을 넘나들며 다양한 장면 속에서 캔버스에 등장하는 ZERO는, 혼돈과 폭력이 넘치는 이 세계에서 치료와 재생을 반복하며 삶을 이어가려는 의지의 상징이기도 하다.
“아루타 수프”는 누구인가?
작가의 아틀리에에서
17살에 영국으로 건너간 아루타 수프는 런던의 캠버웰 예술대학에서 공부하며, 이스트 런던을 중심으로 그래피티 활동도 병행했다. 클럽 문화, 애니메이션 문화, 블랙 유머 등 다양한 요소를 혼합한 스타일을 구축했으며, 2012년에 귀국한 이후로는 순수 미술 분야에서도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FLOWER" 2022, 150×150cm, 90×130cm, Water based paint and oil based paint on Canvas.
개인전 형식의 전시를 비롯해, ‘ZERO’를 모델로 한 BE@R BRICK과의 협업, 국내외 벽화 작업 등 아루타 수프의 활동은 매우 다양하다. 어릴 적부터 예술과 음악이 늘 곁에 있었던 그에게 ‘그림’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증명하는 수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토끼 ‘ZERO’는 작가 자신을 투영한 모습이자, 세상의 복잡함을 함께 헤쳐나가는 전우라고도 할 수 있다.
디지털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물성이기에 가능한 표현
작가의 아틀리에에서
아루타 수프의 작품은 치밀한 러프 작업에서 시작된다. 연필과 펜으로 스케치를 그리고, 디지털상에서 색채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선, 구도, 색채라는 중요한 세 가지 요소를 수차례 시험하고 고민하면서 구상이 완성되면, 비로소 캔버스와 마주하게 된다.
“색채에 관해서 말하자면, 디지털 출력으로는 절대 담아낼 수 없는, 제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색을 안료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작품이 실물로 제작된다는 의미를 관람자가 명확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색(RGB)을 캔버스에 담아 몰입감을 구현하기 위해 다양한 안료를 조합하며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반복합니다. 이를 위해 장인들의 전문 지식과 경험도 함께 녹여내고 있습니다.”
예술의 윤곽을 채우는 선의 표현
작가의 아틀리에에서
미디엄, 색상, 질감, 스타일 등 회화를 구성하는 요소는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선’이다. 작품의 완성도를 좌우할 수 있는 선화에 대해 아루타 수프는 남다른 열정을 쏟는다. 그래피티 아트에서 볼 수 있는 세련된 흐름과 역동적인 선은, 회화 속 세계의 윤곽을 또렷하게 그려낸다.
“다른 아티스트에게 뒤지지 않는 무기가 무엇인가를 생각했을 때, 역시 ‘선’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펜이든 붓이든 스프레이든, 어떤 도구든 상관없고, 단 하나의 색으로도 승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선으로 승부해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홍콩 전시에서는 흑백 작품에 도전해봤고, 실제로 재미있는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소음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무엇을 의지할 수 있을까?
작가의 아틀리에에서
아루타 수프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토끼 ZERO는 이차원뿐만 아니라 삼차원에도 등장한다. 화이트스톤 갤러리 홍콩 / H Queen’s에서 열린 개인전 『Ruins』에서는 입체 작품으로 된 ZERO가 전시장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다.
홍콩에 전시 예정된 입체 작품의 시제품
“이번에 전시할 입체 작품은 조각가 사쿠라이 마코토 씨와의 협업 작품입니다. 입체 작품을 계속 만들어가는 것은 평면 작품만큼이나 중요하며, 제 안에 펼쳐진 공간으로 관람자를 끌어들이는 듯한 몰입감을 주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일종의 ‘영혼의 핵심’ 같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설령 혼돈에 빠져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한 순간에도, ‘이 아이만 있으면 괜찮다, 반드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라는 마음이 들게 하는 존재입니다. 관람자분들에게도 그런 존재로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작가의 아틀리에에서
오늘날 인터넷 시대가 가져온 초정보화 사회에서 개인의 표현이 훨씬 쉬워진 반면, 그 이면에는 피로감을 느낄 정도로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새로운 것이 옳은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아루타 수프는 그림을 그린다는 보편적인 행위를 통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한 마음의 닻을 제시한다.
화이트스톤 갤러리 홍콩 / H Queen’s에서 열리는 개인전 『Ruins』는 2024년 3월 25일부터 5월 11일까지 개최된다. 무너진 빌딩의 구석에서 드러난 파손된 벽화를 모티프로 한 작품들을 직접 감상해보자.